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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아름다움을 지켜 사유의 길을 찾고자 하는 노력과 염원
깊은 생각이 오랫동안 머물다 간 자리에서 피아니스트 안종도의 음악은 비로소 시작된다. 그의 열 손가락은 고결한 생각의 정수가 알알이 맺힌 선율을 매혹적으로 펼쳐내며 연주가 끝나도 깊은 여운과 잔향을 남긴다. 세계적인 콩쿠르 우승자라는 타이틀을 넘어 '사유의 음악가'로서의 그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봄의 정취를 머금은 4월 국내에서 열릴 독주회를 앞두고 독일 함부르크에서 날아온 그의 소식을 전한다.
프렌치 바로크음악의 고귀한 가치를 일깨우다
“모차르테움 국립음대 재학 시절, 파벨 길릴로프(Pavel Gililov) 선생님께서 ‘연주 중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순간이 있단다.’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그 깊은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죠. 이 많은 음을 다 치기에도 벅찬데 그런 순간이 행여 찾아올까 하고요. 하지만 그토록 애타게 갈망해도 찾지 못했던 음악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만큼은 시간과 공간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죠. 그로 인해 느끼는 행복감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예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천사가 내려오는 순간’이란 바로 이런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 순간이 매번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요.”
소중한 가르침 속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는 과정은 진정한 음악의 길을 찾고자 염원했던 그의 바람과 맞닿아 있었다. 시공간을 초월해 음악과 내밀하게 호흡하며 기꺼이 음악 동반자를 자처해온 그는 늘 음악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오는 4월 26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독주회를 통해 선보일 곡들은 그에게 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연주회는 프랑스 오페라의 초석을 다진 작곡가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의 모음곡집(Suite de Pièces), 프랑스 하프시코드 음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 프랑수아 쿠프랭(Francois Couperin)의 신비한 장벽(Les barricades mystérieuses), 장 필리프 라모(Jean Philippe Rameau)의 새로운 클라브생 모음곡집(Les Nouvelles Pièces de Clavecin en La)으로 1부를 꾸미며, 슈베르트의 유작인 피아노 소나타(Klaviersonate B-Dur D. 960) 작품으로 2부를 이어간다. “매번 독주회 프로그램 구성을 위해 정말 많은 시간 동안 고민을 하곤 해요. 프로그램은 연주자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한 형태일 테니까요. 특히 라모를 포함한 프렌치 바로크음악에는 줄곧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어요. 서양 회화에서의 주제가 교회, 신, 황제에서 우리 자신,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으로 옮겨갔던 것처럼 음악도 교회와 황제의 빛에서 벗어나 점차 인간의 심연에서 피어나는 본연의 감성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바로크음악은 라모에 와서 그야말로 정점을 이루게 되는데요. 부드러운 한숨, 기쁨, 사랑의 탄식, 준비된 슬픔 등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단어들이 곡 제목으로 많이 등장할 정도로, 그의 음악은 시적인 어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곡들을 통해 우리 마음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감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 줄 만큼 아름다운 것인지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고귀한 가치를 일깨워준 장 필립 라모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의 의미를 담아 ‘라모의 정원’이라는 부제를 붙이게 됐죠.”
음악을 ‘이성과 감성’의 조화라고 표현하고, ‘좋은 감정과 훌륭한 취향을 음악에 담아내야한다’고 언급했던 라모의 사상은 끊임없는 연구와 탐미(耽味)를 바탕으로 정제된 영혼을 담아내는 그의 음악 세계와도 꼭 닮아 있다. 특히 지난 해 ‘대한민국창조문화예술대상’에서 ‘음악부분 대상’과 ‘가장 아름다운 인물 대전’에서 ‘서울음악상’을 거머쥐며 고국에서도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은 만큼 이번 연주회에 쏟아지는 관심도 한층 뜨겁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이 성실한 태도를 견지하며 음악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저보다 훌륭한 음악가들도 많을 텐데 이렇게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굉장히 쑥스럽습니다.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날카로운 채찍으로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전념해나가겠습니다.”
열정과 사랑으로 더욱 깊어지는 음악 세계
4살 때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천부적인 재능에 한결 같은 노력을 더해 늘 최상의 결과를 도출해냈다. 2002년 예원학교 음악과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재학 중 도오한 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리테움 국립음대 학사과정에 최고 점수로 입학해 학사, 석사, 대학원 과정 모두 수석으로 졸업하며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찬란하게 빛냈다. “오로지 존경하던 음악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을 정도로 무모했기에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어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었습니다. 17세부터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에서 불과 150m 떨어진 곳에서 10년 넘게 거주했었는데요. 그 때문에 함부르크에 살게 된지 5년째인 지금도 잘츠부르크는 제 마음속의 고향으로 남아있죠. 아직도 마음의 위로가 필요할 때면 종종 찾아가곤 해요. 제일 기분 좋은 순간이 잘츠부르크 공항에 내릴 때인데요. 작은 규모의 공항인지라 활주로에 착륙해 터미널까지 직접 걸어가야 하는데 비행기 문 밖을 나설 때 코끝에 닿는 무게 하나 느껴지지 않는 시원한 공기, 티 없이 맑은 하늘, 우뚝 솟은 초록색의 알프스 산, 이 모든 것이 제겐 바로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과 같게 다가왔죠. 그곳에 살며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그가 보았던 하늘을 보며 그의 음악을 공부하다보니 어느 순간 그것들이 제 자신의 일부분이 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음악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환경 속에서 충실히 공부하며 연습에 전념한 시간은 영예로운 결과로 돌아왔다. 2012년,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최대·최고 권위의 콩쿠르이자 세계 7대 클래식 음악 콩쿠르로 꼽히는 ‘롱 티보 크래스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없는 2위로 우승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모나코 공국 알베르 2세 대공이 수여하는 ‘최고 독주상’을 비롯해 ‘최고 현대음악 해석상’도 동시에 휩쓸며 화려한 주목을 받게 된다. 바로 다음해는 ‘폴란드 피아노콩쿠르’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 당시에는 수상의 기쁨을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당황스럽고, 얼떨떨했어요. 그 순간도 잠시, 연주자로서 홀로 일어서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길인지 가혹한 현실을 배우는 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주어진 연주회는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앞으로의 연주는 어떻게 계획해야 할지, 또 개인적인 삶은 어떻게 꾸려야 할지 도무지 답이 서지 않았으니까요. 여전히 그 답을 찾는 중입니다. 예술에서도 그렇듯 인생에도 일반화된 정답은 없으니까요.”
스스로가 세운 큰 성과를 넘어 그는 내면을 닦으며 보다 낮은 자세로 음악의 세계를 궁구해나갔다. 2016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과정(Konzertexamen)을 수석 졸업한 그는 2015년 작고한 그의 스승 마리안 믹달(Marian Migdal) 교수를 대신해 함부르크 국립음대에 출강하고, 교수 대행직을 수행하며 자신이 깨우친 음악의 참 의미를 전했다. “제 한마디 한마디가 학생들의 음악과 인생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니 점점 더 책임감과 중압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도 선생님께 받은 귀중한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전하면서 혼자 연습하고, 연주할 때는 미처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음악 세계를 발견하게 돼 기뻤지요. 학생들이 마음의 길을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보람과 행복입니다.”
사명의식으로 음악의 길을 닦다
시대적 서사를 읽어내고, 음악에 담긴 풍부한 감수성을 이어받아 섬세하고도 정교한 연주를 펼치며 찬사를 받아온 그는 유럽 최대 피아노 페스티벌 중 하나인 프랑스의 레 피아노 폴리에 음악제, 독일 마이센 피아노포르테 음악제, 러시아 뮤지칼 올림푸스 음악제, 스위스 제네바 퓌플랑쥬 클라식 음악제, 루마니아 조르주 에네스쿠 음악제 등 유럽 각국을 대표하는 유명 음악제에서 연주회를 개최한 것을 비롯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등 다수의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무대를 가지며 성공적인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솔로 연주 뿐 아니라 그의 듀오 파트너인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리브 믹달(Liv Migdal)과 수년간 연 10차례가 넘는 유럽 연주 활동을 통해 앙상블 피아니스트로서도 이름을 알리고 있으며, 지난해 프랑스 파리 보아르네 궁전에서 열린 ‘바이마르 드라이에크’(프랑스-독일-폴란드 정상 포럼) 25주년 기념음악회에 아티스트로 초청받아 세계 각국 정상 외교단에게 호평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왕성하게 활동하며 높은 유명세를 얻었지만, 음악을 향한 그의 고뇌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지난해는 특히 제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고단하고 외로운 순간이 많았고, 그러한 삶에 회의가 들었죠. 그러던 와중에 함부르크에서 전 세계 음악가들의 선생님이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Menahem Pressler) 선생님의 책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Verlangen nach Schönheit)' 발표회가 열렸어요. 제가 롱티보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심사위원장이기도 하셨기에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죠. 당시 선생님께서 1시간이 넘도록 스스로의 인생 및 음악철학에 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독일계 유태인으로 태어나 수없이 찾아온 죽음의 기로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음악의 아름다움을 지켜왔던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 고민은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더군요. 발표회가 끝난 후 선생님을 찾아가 이런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제 손을 꼭 잡고 '알지, 자네가 얼마나 힘들지 알지. 나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자네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되네'라며 제 눈을 지그시 바라보셨어요. 93세 노장의 진심이 담긴 위로에 저는 그저 눈물을 와락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장의 따스한 위로는 그간의 쓸쓸함과 공허함을 녹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시금 음악가의 소명을 떠올리며 그는 음악들로 삶을 충만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좋은 작품을 찾아내고 재해석하며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연주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현대음악은 물론이고 고전, 바로크 시대에도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훌륭한 작품들이 굉장히 많아요. 제가 최근 집중하고 있는 프렌치 바로크도 마찬가지고요. 아직 피아노로 이들의 작품을 듣기가 힘든지라 한번 찾아보고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에 더해 제가 열정을 쏟고 있는 독일 가곡도 빼놓을 수 없지요. 현재 슈만의 가곡도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독일 뮌헨 가슈타익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을 비롯해 함부르크·베를린·프라이부르크 및 프랑스 파리·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연주 투어를 앞두고 있는데다 슈만과 라모의 곡으로 채운 음반 녹음도 계획 중일 정도로 바쁜 나날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의 학구열을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예술만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는 초월적인 세계에 닿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이 존재하고 그곳이 육신의 몸으로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예술은 살아있는 자에게 천국을 잠시 보여줄 수 있는 신비한 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존경하는 대가들의 연주나 작품들을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하늘로 닿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거든요. 오로지 예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정진해나가겠습니다.”
켜켜이 곱게 접어낸 선율과 노력의 산물들로 이루어진 그의 음악세계가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찬란한 낙원으로 청중에게 다가가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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